고백컨대, 수녀님들이나 스님들이 행복이나 나눔, 공(空)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 속 이야기라 생각했다.
평온하고 안락한 환경에서 '호사'를 부린다며 색안경을 끼기도 했다.
그런데 이해인 수녀와 혜민 스님이 범인과 같은 고민을 털어놓는다.
고민을 들으며 한참을 웃고 울다가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라"라는 진부한 말이 귀에 쏙 들어와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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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끝자락, 유달리 바람이 차가웠다.
해는 2시간 전에 저물었고 코트 속은 한기로 가득 찼다.
사위는 어둑했다. 지난 12월 17일 경희대 캠퍼스 끝에 위치한 평화의 전당은 추위와 어둠의 성채처럼 보였다. 아주 견고한.
평화의 전당의 묵직한 문을 밀고 들어갔을 뿐이다.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노랗고 따스한 불빛, 따뜻하고 여유로움이 넘친다.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여유와 해맑음이 동시에 느껴졌다.
마감이 임박해 조급한 마음으로 강연장을 찾은 기자가 이질감을 느낄 정도였다.
오후 6시 50분, 아직 공연이 시작되기 전인데도 5백 명이 넘는 참석자의 들뜬 기분이 강연장을 가득 메웠다.
'위(We)대한 토크'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이날의 토크 콘서트는 혜민 스님의 강연과 이해인 수녀의 대담 그리고 가수 JK김동욱,
배우 강성연, 재즈 피아니스트 김가온의 공연으로 이뤄졌다.
모두 좋은 일에 동참하겠다며 기꺼이 노 개런티로 재능 기부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있음으로 해서 무대는 한층 다채로워졌다.
이날 토크 콘서트의 중심은 혜민 스님이었다. 스님은 과한 기교 없이 담백하고 따뜻한,
그러면서도 정직한 언어로 사람들을 위로하며 단박에 이 시대의 멘토로 떠올랐다.
하버드대 출신인 혜민 스님은 승려 최초로 미국 햄프셔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에세이집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 출간 7개월 만에 1백만 부 판매를 넘기며 베스트셀러 작가 타이틀을 더하기도 했다.
독자의 힐링을 바라는 마음으로 혜민 스님의 강연, 이해인 수녀와의 대화를 지면으로 옮긴다.
멈춰야 행복해진다
스님은 종교적이지 않았다. 복잡한 불교 교리를 말하는 대신 '마음공부' 하는 법을 전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제 책 제목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다 보니 사람들이 '스님, 바쁜데 왜 자꾸 멈추라고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하하. 제가 직접 이야기하는 것보다 어떤 분의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야구선수 박찬호씨, 배우 차인표씨와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 도중에 많은 이야기를 하다가 박찬호씨가 깜짝 놀랄 이야기를 했습니다.
'스님, 저는 왜 멈춰야 하는지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라고요.
제가 이유를 되물으니 그는 '야구공을 던질 때 마음이 멈춰 있지 않으면 공을 잘 던질 수가 없습니다.
'요즘 성적이 부진한데 잘 던져야지' 혹은 '타석에 들어선 선수가 홈런왕인데 홈런을 맞으면 어떡하지' 등의 생각을 하면
공이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날아가지 않아요. 공을 던질 때는 잠깐 멈추고 생각을 비우는 게 중요하더라고요'라고 대답했어요.
저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른 생각들을 정리하고 집중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집어낸 듯합니다."
그는 이어 스스로를 '도시를 좋아하는 동네 스님'이라고 밝혔다.
도시의 스님이기에 스마트폰으로 게임도 하고, SNS상에서도 활동한다.
이 정도면 신문물 습득력이 떨어지는 기자보다 스마트폰을 더 잘 활용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에게 스마트폰은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기계 이상의 의미다.
그는 1백40자 단문의 트위터에 인생의 지혜를 담은 위로의 글을 올린다.
팔로워만 33만 명을 넘는 파워 트위터리안이다.
그의 글은 일상생활에서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한 처방전이 된다.
"제가 트위터에 글을 자주 올려요.
그걸 보고 주변에서 '스님, 생각 짜내서 글을 올리는 게 힘들지 않으세요?'라고 물어요.
그런데 이게 실제로 생각을 짜내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을 잠깐 멈추고 내 마음속에 어떤 것이 흐르는지, 마음이 어떤 패턴으로 지나가는지 보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자연히 지혜가 생깁니다. 멈춰야 보이고, 보여야 지혜가 나와요. 생각이 많다고 해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면 지혜롭게,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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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말하는 멈춰야 보이는 지혜가 무엇일까. 행복에 이르는 지혜가 아닐까.
"스스로 뭘 원하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스스로 원하는 것을 모르고 있을까요?
바로 내면에 자신의 말은 없고 다른 사람들의 말만 잔뜩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혹은 내 행동을 어떻게 평가할까'라는 고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정작 자신의 마음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는 듣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럴 때는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중요합니다. 거창하게 여행을 떠나라든가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일상에서 스마트폰에 너무 집착하는 거 같아요. 문자메시지나 카카오톡이 오면 바로 반응하잖아요.
그렇게 반응하는 삶에만 익숙하다 보니 내가 주도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는 습관을 잃어버린 듯합니다."
1시간여에 걸친 혜민 스님의 강연이 끝나자 이해인 수녀가 무대에 등장했다.
어색한 조화. 종교도, 나이도, 성격도 다르다. 물론 공통분모는 있다.
두 사람은 요즘 대중이 열광하는 '힐링'을 주도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종교인이다.
그게 큰 자랑이자, 그에 못지않은 부담일 것이다. 그럼에도 '조금 특별한 선물'을 위해 모인 두 사람에게 긴장감이나 경쟁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둘은 서로 상대의 '언어'를 써가며 배려하기 바빴다. 혜민 스님이 "건강은 괜찮으시죠?"라며 말문을 열었다.
먼 길을 이동한 수녀의 건강부터 챙기는 살뜰함이 말투에서도 묻어난다.
수녀님
괜찮아요. 매달에 한 번씩 정기검진 받고 있어요. 힘들면 서울까지 못 올라왔을 텐데 다행히 상태가 괜찮습니다.
스님
사실 몇 개월전에 수녀님을 한 번 만났습니다. 그때는 여름이었는데 지금은 겨울이네요. 요즘 크리스마스 준비하느라 바쁘시지요?
수녀님
절에서는 초파일이 바쁜 것처럼 우리도 엄청 분주합니다. '대목'이잖아요. 대청소하고 노래 연습에 성탄 과자 굽고,
독거노인 집에 바나나와 과자 등을 배달하는 일도 해야 해요.
스님
그러네요. 저희도 초파일에 무척 바쁘거든요. 수녀님, 요즘 저는 고민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가 알지도 못하는 연애 상담을 자주 해옵니다. 저는 출가한 사람인데 말이지요.
수녀님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경험도 없는데요.
시련의 아픔, 부부 갈등 등을 편지나 이메일 등으로 보내거나 방문해서 상담 요청을 하는 분들도 계시고요
(이해인 수녀는 열아홉 살에 수녀원에 입회했다).
그런데 우리에게 와서 어떤 해결책을 찾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부산 광안리 같은 곳에 가서 "와~" 소리 지르며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것과 비슷하겠지요.
비밀도 보장되잖아요. 소문날 염려도 없고요.
종교인도 고민하는 사람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스님처럼 산속에서 살거나 수녀님처럼 수도원에 지내면서 평화로운 생활을 하다 보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사회는 전쟁터고, 죽도록 보기 싫은 사람과도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살아가야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온실 안 화초 같은 종교인들이 어떻게 진흙탕 속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아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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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종교인으로서 저희 역시 좋은 사람도 있고 왠지 싫은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는데요, 마음이 가는 학생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있어요.
어떤 학생은 졸업 뒤에 좋은 취직자리를 얻었다며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말을 해요.
이럴 때는 정말 기쁘죠. 이런 학생만 있는 건 아니에요. 정반대의 학생도 있습니다. 저희 학교는 상담 시간이 따로 있어요.
그런데 유독 한 학생이 그 시간에 상담을 하지 못하니 시간을 바꿔달라는 거예요. 처음에는 제 스케줄을 조정했습니다.
그런데 시간 조정 요청 메일을 세 번째 받으니까 제 마음속에 '학생이 바꿔야지. 매번 교수가 학생 시간에 맞춰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시간을 변경하는 이유를 듣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더니, 자기가 굉장히 바쁘대요. 그 회신 메일을 받고 나니 더 싫은 거예요.
왜 이렇게 사람이 싫은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는 그 여학생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걸 저도 모르게 꾹꾹 눌러놨던 거 같아요. 그 학생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제가 싫어하던 제 모습이 보이는 거예요.
저 역시 무슨 일을 하든지 명확하지 못하게 능구렁이가 담 넘듯이 지나가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 학생에게서 제 단점을 본 것이고, 사실 그 학생이 싫은 게 아니라 제 단점이 미웠던 것이지요.
그렇게 멈춰 서서 제 마음을 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수녀님
저도 힘들어요. 요즘 굉장히 우울합니다. 하루는 혜민 스님 트위터를 보게 됐어요.
거기에 꼭 제게 하는 듯한 말씀이 있더라고요. '부족한 나를 내가 사랑해주세요. … 친구는 위로해주면서 스스로에게는 왜 함부로 대하는지요.
사랑해주세요'라는 글이었어요. 그것을 읽으면서 내가 다른 사람은 구하고 나 자신은 못 구했구나,
내가 스스로를 못마땅하게 생각했구나, 나에게도 위로가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스님
사실은 저 역시 제가 쓴 글을 보면서 제가 위로받을 때도 있습니다. 힘들 때면 제가 쓴 책을 보면서 스스로 위로하기도 하고요.
트위터에 올린 글도 저한테 쓰는 글들이 많아요.
나는 왜 스스로를 덜 사랑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더욱 사랑하자는 다짐들이지요. 혜민 스님도 혜민 스님이 필요합니다(웃음).
수녀님
누군가가 보내온 이메일을 읽다가 인용구가 참 마음에 드는 거예요.
'이 글 참 괜찮다. 누가 썼지?' 하면 제가 쓴 글이에요. 저 역시 제가 쓴 글을 읽으면서 안정을 얻습니다.
사실 제게 오는 어려움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에요. 내부에서 오는 것이에요.
지금도 혜민 스님을 보면서 '30년 연하인데 저렇게 지혜가 있구나'라는 생각을 해요.
나는 40년간 수도생활을 했는데 왜 이렇게 평정심이 없고 겸손과 지혜가 부족한가, 라는 그런 자책도 합니다.
인간이라 이런 생각들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스스로 사랑하자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수도원에 들어온 지 40년이 넘었지만 이 길을 선택한 걸 후회한 적은 없어요. 오히려 얻은 것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서신을 주고받는데요. 부모님 중에 자살한 사람이 있으면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이잖아요.
그런 소녀에게 죽을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답장을 보낸 적이 있어요.
하루는 그 소녀가 아가씨가 돼서 저를 찾아왔더라고요.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기 전에 들렀다면서 그때 그 편지가 굉장히 큰 힘이 됐다고 말했을 때 보람을 느꼈지요.
혜민 스님 역시 절망에서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있다.
미국 명문대 출신인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지 어느덧 13년이 됐지만 미련이나 후회는 없다고.
개인적으로는 사람과 지혜를 얻었고 그 안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또 한국 청년들과 인연을 맺어 그들에게 위로가 됐다는 반응을 들을 때마다 고마움과 보람을 느낀다.
이날 강연도 국내의 저소득계층 아동들을 위한 행사였다.
스님은 국내 저소득계층 아동이 무려 1백만 명이나 된다는 말을 듣고 아직도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굶고 있다는 사실에 정말 놀랐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 토크 콘서트 형식으로 강연을 열게 된 것이다.
남을 보기보단 자신을 보고,
거기서 얻은 평온을 에너지 삼아 다른 사람들을 돕는 두 사람. 종교인이지만 성인이라기보다는
옆집 수녀님, 동네 스님 같은 이해인 수녀와 혜민 스님과의 대화에서 또다시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다.
정답은 가까이에 있지만 접근하기 어렵다.
인생의 지혜, 사실은 비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듣고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지혜가 나온다는 오래된 이야기들. 이제 실천하는 일만 남은 듯하다.
밤 10시 즈음, 평화의 전당 문을 열고 나오면서 휴대전화 전원을 껐다.
지하철로 이동하는 동안만이라도 내면의 소리를 듣고 싶어서다.
두 사람이 기자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안긴 선물이리라.
단순한 진리를 행동으로 이끌어내는 것,
이것이 No.1 힐링 멘토 이해인 수녀와 혜민 스님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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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 스님의 트위터 명언
-객관적으로 성공한 사람도 주관적으로 지금 일에 만족하지 못하면 불행합니다.
반대로 지금 하는 일이 특별할 것이 없어도 주관적으로 지금 일에 만족하면 행복을 느껴요. 행복은 성공 순이 아니라 만족 순.
-다른 사람의 결점이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내 안에도 똑같은 결점이 어딘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아는 사람과 잘 모르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강하면 본인의 재주에 한계가 금방 옵니다.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함부로 하는 말들 하나하나에 관심을 두면서 가슴 아파하지 마세요. 때론 무시할 줄 아는 것도 지혜입니다.
마음을 자꾸 그곳에 두면 무의식은 정말로 '내가 그런가 보다' 하고 믿어요. 그게 더 문제입니다.
"나는 40년간 수도생활을 했는데 왜 이렇게 평정심이 없고 겸손과 지혜가 부족한가, 라는 그런 자책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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