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전국성지순례

공세리, 남방제, 성거산, 배티성지 (20.21.22.23)

한진포구 2021. 8. 5. 02:46

순례를 떠나면서 바치는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친척 엘리사벳을 돕기 위하여 길을 나선

겸손과 순명의 여인 마리아의 발걸음을 인도 하셨듯이

지금 길을 떠나는 저희를 돌보시고

안전하게 지켜 주시어

목적지까지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또한 주님께서 언제나 저희와 함께 계심을 깨닫게 하시고

길에서 얻는 기쁨과 어려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게 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믿음, 사랑의 생활로

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공세리성당 성모동산
야외미사 중
순교자들의 무덤에 야외 제대
공세리성당의 전경

이런저런일로 미루었던 성지 순례를 시작한다.

수산나는 준비에 한창...ㅎㅎㅎ

그냥 몸만 떠나면 될터인데 준비할 것이 많은가 보다.

마음이 참 편안한 성지성당이다. 몇해전  4월에 눈이 얼마나 왔던지 성당에 오르는 길이 마치 천국에 온것 같은 환상에 

빠지게도 했던곳. 성모동산을 지나 32위 순교자가 모셔진 야외 제대에서는 미사중이었다.

순례자들이 오늘도 많이 찾는다. 순례자는 성지성당 뒷편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남방제로 출발한다.

남방제 성지는 박해시대에 교우촌을 형성했던 곳이다.

조윤호 요셉 성인이 태어났고 많은 순교자들이 살았던 거룩한 곳이다.

]순례자는 야외 제대를 향하여 순교자들을 위한 주모경을 바치고 순교자를 배출한 이 거룩한 땅에 저희 가정의

평화를 기도한다.

무명순교자 제1무덤 입구
제1줄무덤 무명순교자
제2줄무덤 무명 순교자
소학골 교우촌 모습

성거산 교우촌은 선교사들이 사목활동을 하던 중심지 였다고 한다. 주변의 배티와 넓게는 경기와 경상까지

교우촌들과의 공동체및 많은 선교사들이 활동하였다고 한다.

많은 무명순교들이 이곳 성거산 거룩한 땅에 안치되어있다.

나태된 순례자의 신앙을 뒤돌아 보면서 배티성지로 이동한다.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 (부),최양업 토마스 가경자,  이성례 마리아 (모)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님이 최초로 신학교 설립한 곳

이곳 배티성지는 유,무명 순교자들이 묘가 주변에 많이 있다.

김대건 안드레아 초대 신부님에 이어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두번째 사제서품에 오르신 분이다.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이 이곳을 본당으로 삼고 전국 다섯개 도를 다니시며 사목활동을 하셨다.

최 토마스 신부님의 박물관이 있다."백색 순교자" 라 하여 박물관 안에는 백색으로 많이 조성되어 있었다.

최양업 신부님의 일대기가 잘 정돈되어 있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기도 드립니다.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생애

 

최양업 신부는 1821 3 1일 충청도 청양 다락골에서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27년 무렵, 가족은 서울, 강원도, 경기도 부평, 안양시 수리산으로 박해를 피해 이주를 거듭하면서 신앙을 지켰다. 1836 2 6일 경기도에서 살고 있던 15살 최양업은 모방 신부로부터 한국인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뒤를 이어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방제, 김대건과 함께 그해 12 3일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정하상(바오로)이 국경 넘어 변문까지 동행했다. 이후 마카오 파발꾼이 신학생들을 데리고 마카오까지 갔다. 1837 6 7, 6개월이 넘는 고생 끝에 중국대륙을 횡단하여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해 신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시련이 곧 닥쳐왔다. 마카오 민란으로 1839 4월에서 11월까지 최양업은 교수 신부들과 함께 필리핀 마닐라 근교 롤롬보이로 피신했다. 최양업은 1842 7월 파리외방전교회 조선 선교사와 함께 마카오를 떠나 요동반도 태장하 해안 백가점을 거쳐 11월 소팔가자에 이른다. 최양업은 이곳에서 신학 교육을 받고 1844 12월,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았다. 이후 김대건은 조선 입국에 성공한 후 배를 타고 상해로 건너와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주교와 함께 조선 재입국에 성공했다. 반면, 최양업은 소팔가자에 머무르면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통한 조선 입국 루트를 개척했다.

 

   최 부제는 1847년 초 홍콩 극동대표부로 돌아가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쓴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해 파리로 보냈다. 이 문서에 기록된 기해년과 병오년 순교자 82위 중 79위가 시성되었다. 최양업은 1849 4 15일 상해에서 마레스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두 번째 한국인 사제였고, 그의 나이 28살이었다. 사제 수품 후 그해 5월, 최양업 신부는 매스트르 신부와 서해 뱃길로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요동지방 양관과 차쿠에서 베르노 신부를 보좌해 중국 신자들을 사목했다. 이로써 최 신부는 한국인 첫 해외 선교사가 되었. 최 신부가 차쿠에서 사목한 기간은 7개월가량으로 1849 5월 말에서 12월 말까지다. 최 신부는 1849 12월 압록강을 넘어 13년 만에 귀국한다. 1850 1월 서울에 도착한 최양업 신부는 조선에서의 성무를 시작했다. 최 신부는 잠시도 쉬지 못하고 교우촌 순방에 들어갔다. 페레올 주교는 서한에서 최양업 신부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제가 무거운 짐을 다 짊어져야 했을 텐데 최 신부의 입국으로 하느님께서 저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셨는지 잘 짐작하실 것 이라고 썼다. 최 신부가 1년 중 순방해야 할 교우촌은 전체 교우촌의 약 70%에 해당하는 120여 곳으로 해마다 2,800 를 걸어야 했다.

 

   교우촌을 다니던 최 신부는 우리말 교리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의 여덟 번째 서한에서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 있다.” 며 주요 교리와 기도문을 가사체로 노래한 천주가사를 편찬했다. 그는 1859년 여름 다블뤼 주교를 도와 한국교회 최초의 공식 교리서인 한문본 성교요리문답과 한문본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완성했다. 최 신부는 갈수록 쇠약해졌다. 12년간 해마다 7,000여 리를 걸어 교우촌을 순방한 그는 지쳤다. 1861 6 15, 최 신부는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경북 문경 인근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배론에서 급히 달려온 푸르티에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예수님과 성모마리아의 이름을 되뇌다 선종했다. 그의 나이 만 40살이었다. 조선에 들어와 사목한 지 11 6개월 만이다. 최 신부의 유해는 선종지에 가매장됐다가 훗날 배론성지에 안장됐다.

 

  1801년 충청도 홍성에서 태어난 이성례는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옮겨 다니는 가운데서도 모든 어려움을 기쁘게 참아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 최경환은 한양을 오가면서 순교자들 시신을 찾아 묻어주고 교우들을 돌봤으며, 이성례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어려운 이웃과 자신의 자식들을 알뜰히 보살피며 살았다. 부부는 자신들도 곧 체포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부부는 새벽에 수리산 교우촌을 급습한 포졸들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맞았다. 최경환은 포졸들에게 교우들과 함께 질서정연하게 따라갈 테니, 잠시 쉬었다가 식사를 하고 떠날 것을 권했다. 이성례는 포졸들을 위해 밥상을 차렸고, 최경환은 포졸들이 식사를 마치자 장롱에서 옷을 모두 꺼내 포졸 한 명 한 명에게 입혀줬다. 순교하면 필요 없게 되는 옷이었다. 그 사이 감옥으로 떠날 준비를 마친 남녀노소 신자 40여 명은 행렬을 이뤄 한양을 향해 걸어갔다. 이성례도 젖먹이를 포함한 아들 5명을 데리고 남편을 따랐으며, 신자들이 달아날 염려가 없다는 것을 안 포졸들은 이들을 오랏줄로 묶지도 않았다고 한다. 끌려간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들이 순순히 나선 것은 순교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이성례는 남편과 격리된 채 젖먹이 아들과 함께 여인 감옥에 수감되었다. 잡혀온 다음날부터 문초와 형벌을 받아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지만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했다. 이미 순교를 각오한 터였기 때문이다. 정작 이성례를 괴롭힌 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옥에 함께 있는 젖먹이였다. 젖은 나오지 않고 먹일 것이 없어서 막내아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남편은 매를 맞아 순교하고, 젖먹이는 더러운 감옥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성례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순교하면 젖먹이뿐만 아니라, 밖에서 구걸로 연명하고 있는 나머지 4형제 모두 고아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막내가 굶어 죽자 이성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천주를 모른다." 고 외치고 감옥에서 풀려나왔다. 남은 아이들마저 잃고 싶지 않은 지극한 모성애였다. 얼마 후 이성례는 큰아들 최양업이 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압송됐다. 그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 격려에 힘을 얻어 전에 했던 말을 용감하게 취소했다. 잠시나마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1840 1 31, 이성례는 동료 신자들과 함께 당고개로 끌려가 순교했다. 안온하고 평화로운 얼굴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나이 39살이었다. -류시영 블로그 펌-

 

하느님의 종 최양업 사제 시복시성 기도문

 

지극한 사랑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최양업 토마스 사제를 보내주시어 혹독한 박해로

쓰러져 가는 한국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으니

그 자애로운 은총에 감사하나이다.

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사제는 굳건한 믿음과 불타는 열정으로

구만리 고달픈 길을 마다하지 않고 방방곡곡 교우촌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을 돌보는데 온 정성을 바쳤나이다.

자비로우신 주님, 

간절히 청하오니 최양업 토마스 사제를 성인 반열에 들게 하시고

저희 모두가 그의 선교 열정과 순교 정신을 본받아

이 땅의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하여 몸바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순례를 마치면서 바치는 기도

 

주님,

오늘 저희의 발걸음을 이끌어 주시고

모든 일에 함께하여 주심에 감사하나이다.

기뻣던 시간들 ,힘들었던 순간들

주님께 봉헌하며 청하오니

건강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가

가족과 이웃에게 주님의 참사랑을 전하게 하소서,

아울러 이 세상에 살면서도 

늘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지상의 나그네로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굳은 믿음과 희망을 지니게 하시고

이 순례의 끝에 주님께서 마련하신 사랑의 천상 잔치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