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마르코. 8,14-21)
그때에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하고 분부하셨다.
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열둘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그들이“일곱입니다.”하고 대답하자,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018. 02. 13 (화)
출처 매일미사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21).
어제는 빵
다섯으로 오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일곱으로 사천 명이 먹고 일곱 바구니가
남았다.
그런데 오늘은
빵이 하나다.
몇 명이나 먹고,
몇 바가지나 남을까?
내일에 대한
걱정들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늙어가는 이들이 “대책이 없다.”고 수근 거린다.
이제 황혼을 ‘시니어 보릿고개’라며 한숨짓는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야단을 맞고도 걱정은 가시지 않는다.
지선악수 열매에 대한 유혹이 이런 것이었나?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이는 쪽으로 눈이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광야로 가 세 차례나 유혹을 자초했듯이 배고파질 입들에게 ‘빵 하나’는 분명 분심거리요 유혹거리다.
유혹은 위기도 될 수 있고 계기도 될 수 있다.
예언자를 시켜 위기를 맞은 아하즈에게 표징을 청하라 했을 때 그는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이사 7,12)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를 시험하지 않겠다’는 말은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신명 6,16)는 말을 지키는 것 같지만
실은 ‘나를 믿어봐야 쓸데없다’는 속심을 둘러댄 것이었다.
‘빵 하나’는 미래에 겪을 수많은 ‘네 번째 유혹’(루카 4,13) 중 하나다.
그것은 아하즈처럼 ‘나를 시험하지 않겠다’며 스스로 노력해서 미래를 열려는 유혹이다.
세상은 점점 풍요로워지기 때문에 그런 유혹은 갈수록 거세져 네가 죽을 것만 같아질 것이다(마태 8,24-26).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계속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오늘까지 걸어왔다.
앞으로 갈 길도 그렇다.
‘빵 하나’는 네게 무덤이 될 수도 있고, 하느님께서 네게 보여주실 표징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신덕은 네 신념도 아니고 미래를 안전하게 만들려는 네 의지도 아니다.
그것은 나를 믿고 나를 향해 물 위를 걸어오는 것이다.
걷다가 물속으로 빠져들더라도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라며 나를 믿고 내게 손을 내미는 용기다(마태 14,30).”